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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media

WALL·E 월-E ★★★★

WALL·E 월-E ★★★★
Director:Andrew Stanton
naver    imdb

이 애니메이션도 평이 워낙 좋아서, 어차피 보게 될꺼 한꺼번에 해치워버리자 싶어, 심야로 <다크 나이트>를 본 다음날 조조로 <월-E>를 보았습니다.

<월-E>에 대해 뭔가 꼬투리를 잡는 건 거의 부당한 처사입니다. 만약 <월-E>의 과학적 고증이 엉망이라고 비웃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메마른 감수성은 주위의 지탄을 받아 마땅합니다. 가슴 설레도록 아름다운 장면들-우주에서 펼쳐지는 이브와 월-E의 댄스, 토성 고리의 얼음과 먼지들이 월-E의 손에서 흩어지는 장면...-과 놀라운 그래픽 기술, 쉴새없이 터지는 웃음과 적어도 지구인 90%는 공감할만한 보편적인 메시지, 거기에 순도높은 로맨스까지 펼쳐지는데 어디서 감히 불평질이냐구요. 전 <라따뚜이>와 <니모...>, <토이스토리2>도 무척 재밌게 보았고 다들 굉장한 작품들이라고 생각하지만, 픽사의 작품들 중 가장 가장 높은 완성도를 보이는 건 <월-E>라고 생각힙니다. <다크 나이트>와 마찬가지로 <월-E> 역시 안 본 사람이 불쌍해지는 영화입니다. 어지간하면 극장 가서 보시길... 

안 그래도 요즘 가뜩이나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데다가, 꽤 어릴적부터 인류의 미래를 비관해왔던 저로서는, 지구를 떠나 700년 동안 우주를 떠돈 인류의 운명과 지구로 귀환한 이후의 삶에 대한 <월-E>의 낙관적인 전망에 쉽게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월-E>가, 가령 지구온난화의 실체를 부정하는 일단의 과학자들처럼, 모종의 현실을 왜곡함으로써 누군가의 경제적 이익에 봉사할 소지가 있다고 생각되지도 않아요. 그러기에는 <월-E>가 묘사하는 지구와 자본주의의 미래가 너무 끔찍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두 가지 중대한 도전, 즉 '지속가능성'과, 노동력 착취 혹은 불평등한 부의 분배에 의한 정치적 불안이 모두 해결된다는, 자본주의 미래에 대한 가장 최선의 조건을 가정하고도 말이에요.
 
<월-E>에서 제공되는 정보만으로 정리해보면 대충 이렇습니다. 자본축적이 고도화된 미래의 지구는 BNL(Buy and Large)라는 하나의 거대 기업이 쇼핑몰에서 우주여행에 이르는 생활의 전 영역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BNL은 정부의 역할까지 대신하는 것 같아요. 우주로의 이주나 지구청소(?)가 모두 BNL에 의해 추진되는 듯합니다. 더불어 우주개척과 로봇공학의 발달을 통한 막대한 자원 확보와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은 지속가능성이나 부의 분배라는 문제제기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바야흐로 자본주의적 유토피아가 실현된 거지요.

그런데 그 결과, 지구 전체가 쓰레기로 덮여버려 700년이 지나야 겨우 풀한포기 자랄 정도로 환경이 파괴되고, '소비자'들은 '권태조차 느끼지 못하는 돼지'로 퇴화해 버립니다. 자유의지의 작동없이 자본이 공급하는 감각적 쾌락을 일방적으로 수용하기만 하는 저 궁극의 소비자들은, '매트릭스'에 포획되어 행복한 꿈을 꾸고 있는 캡슐 속 인간들과 다를 바가 없어보이고, 그런 의미에서 <월-E>는 꽤 신랄한 자본주의 비판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그 소비자들이 프로이드적 쾌락원칙을 극복하고 스스로 노동하는 인간으로 거듭나는 <월-E>의 결말은 전형적인 디즈니식 해피엔딩인 것 같기도 하지만, 동시에 마르크스적 노동관의 시대착오적인 재현같기도 해서 얼떨떨한 기분이 드는군요.

물론 현실의 소비자라면 지루해 하며 살아갈망정 노동의 삶을 선택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이미 비슷한 선택을 하고 있잖아요? <매트릭스>의 Cypher의 경우처럼 자발적으로 '매트릭스'에 동화되겠다는 자의식은 없을지 몰라도, 현실세계에서의 부대낌 대신 다양한 미디어가 제공하는 감각적 쾌락-네트워크 게임부터 포르노까지-에 의식을 맡겨버리는 것이 우리 일상의 모습이잖습니까? 비약일지 몰라도, 현실정치에 대한 실망감을 현실의 장에서 해결하는 대신 비슷한 견해를 가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의견을 공유하며 정치적 갈증을 해소하는 네티즌들의 경향 역시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표의 행사가 몇백줄의 키보드질보다 더 강한 영향력을 가져다 준다는 걸 모르지 않을텐데, 다들 어느 온라인 상에서 어떤 쾌락을 즐기고 계셨길래 지난 세 번의 선거 결과가 그모양그꼴이었냐구요. 인터넷만 한정해서 본다면 정치적 기반이 전무한 듯 보이는 정치세력들이, 현실세계에선 자신의 지배를 뻔뻔하고도 폭력적으로 확장하고 있는 요즘의 살풍경을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요즘 영화가 너무 잦았어요. 한동안은 보고싶어 미치겠는 영화가 없을 듯 합니다. 제발 제가 극장 근처에서 얼쩡거리지 말기를 기도해주세요, 저 이러면 안되거든요 씨발.  (2008.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