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eet Sixteen & ぼくんち 스위트 식스틴, 보쿤치-내가 사는 곳 (2002 Piff) ★★★★
* 17일
1. 신의 간섭 (엘리아 술레이만, France/Morocco/Germany, 2002, 92min)
http://us.imdb.com/Title?0274428
2. 불확실성의 원리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 France/Portugal, 2002, 133min)
* 18일
1. 교사형 (絞死刑) (오시마 나기사, Japan, 1968, 117min)
2. 광음적고사 (에드워드 양 등...)
3. 보쿤치-내가 사는 곳 (ぼくんち) (사카모토 준지, 2003년)
http://www.tojapan.co.kr/culture/movie/pds_content.asp?service=worklib&number=548
4. 스위트 식스틴 (켄 로치) http://us.imdb.com/Title?0313670
물론 영화보는 것이 영화제에 가는 가장 큰 이유라면, 자기암시 효과는 두번째 이유다.
나는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는 내 삶의 기쁨이며... 이교도의 핍박과 고단한 여행길을 마다않으며 성지순례를 떠나는 동기와 비슷하달까. 그의 영화 세 편 보겠다고 포항서 서울까지 찾아간 후에야 비로소 오즈 야스지로의 팬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게 된 사연은 흡사 신앙고백과도 비슷한 경험이었다.
졸업이다 뭐다 없는 시간을 쪼개 없는 돈 긁어 모아가며 부산영화제에 찾아간 것도 짤없는 영화광으로 거듭 나기 위한 자기수행의 연장에 다름없다.
그런 맥락에서 부산영화제는 좀 가찮다. 까짓 부산쯤이야. 게다가 사람도 그닥 많지 않고 문화회관같은 소박한 장소에서 영화를 상영하는 부천영화제에 비하면, 떠밀려다닐 정도로 빠글대는 사람에 메가박스 같은 데서 영화를 틀어대는 부산영화제는, 어딘지 돗대기 시장처럼 번잡하고 정이 안간다.
올해 부산 영화제에서 본 영화 여섯 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는 역시 켄 로치의 Sweet Sixteen. "이치 더 킬러" 한 편만으로도 올해 부천영화제를 찾은 보람이 있었다면, 이 영화 한편만으로도 부산영화제에 온 이유가 충분히 된다. 스위트 식스틴은 켄 로치의 영화치곤 이례적이다. 이전 영화처럼 자본과 국가의 폭력, 노동계급의 자기개혁 같은 사회적 메시지 대신, 이 영화는 가족애와 우정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빈민계급 출신 10대 소년의 멘탤리티를 해부한다. 이전 영화중에 가족애나 부성애, 혹은 모성애에 대해 이야기한 영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컨대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가 국가의 폭력을 드러내기 위해 모성애라는 소재를 빌려온 것과는 달리, 이 영화에서는 자본주의적 상거래의 가장 순수한 구현인 마약밀매라는 소재가 단지 '배경'으로 물러난다. 주인공의 짧은 인생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린 사건이 마약밀매의 당연한 수순인 체포나 살해가 아니라, 제대로 된 가정을 만들고 싶어하는 욕망 때문이라는 점은, 골수 사회주의 감독의 영화로선 의외의 결론이다. 이건 마치 브라이언 드 팔마 버전의 '스카페이스'를 보는 듯하다. 누이에 대한 근친상간적 욕망이, 각종 범죄의 형태로 구현되는 자본주의의 병폐에 대한 고발과 비판의식을 압도했던 것처럼.
물론 빈민계급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과, 빈곤을 탈출하기 위한 방법은 '범죄'뿐이라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신랄한 분석은 분명 켄 로치적이지만, 마약밀매를 통해 얻은 짧은 성공이 가족애와 우정 때문에 무너지고 만다는 결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켄 로치적인 분석으론 의외이거나 너무 완곡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결말은 예컨대 기타노 다케시의 '키즈 리턴'과는 다른 위치에 서있다는 점도 분명하다.
"바보, 아직 우리는 시작도 안했잖아"같은 대사를 스위트 식스틴의 주인공은 내뱉을 수 있을까? 마약밀매와 상해로 이제 곧 감옥에 가야하는 소년이 무슨 희망을 품을 수 있단 말인가? 켄 로치가 이전 영화보다 덜 분명한 정지경제학적 분석을 내놓은 것은, 어쩌면 이 영화를 통해 딱 10대 소년이 느낄만한 세상에 대한 절망감과 무기력을 묘사하려는 의도인지도 모른다. 우린 기껏해야 마약밀매로 거둔 짧은 성공 정도가 이 소년이 기대할 수 있던 유일한 성공의 통로라는 것을 알고 있고, 또 그런 성공의 말로가 어떠하리라는 것도 충분히 예감할 수 있었다. 그런 세상인 거다, 영국은. 쉽게 희망을 얘기하지 않는 켄 로치는 그래서 예컨대 기타노 다케시와는 다른 정치적 위치에 서있고, 때문에 다소 감상적인 "스위트 식스틴"은 역시 켄 로치적인 영화라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암울한 현실속에서도 쉽게 무너지지도 않는 건강한 투쟁의지를 보여주던 켄 로치이고 보면, 이 비참한 성장영화는 오히려 그의 어떤 영화보다도 자본주의에 대한 암울한 비젼으로 가득 찬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사카모토 준지의 '보쿤치-내가 사는 곳'도 기억에 남는 영화다.
국내에 소개되는 일본의 상업적 흥행물들의 가장 큰 미덕는 그것이 비록 낯뜨겁게 작위적일지라도 인간에 대한 믿음, 소외되고 부족한 인간들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셜 위 댄스", "스페이스 트래블러스", "웰 컴 미스터 맥도날드", "워터 보이즈", "자살관광버스"같은 영화의 주인공들은 다들 모자라고 어설프며 사는 데 서툰 평범한 인물들이다. 그들은 평범하지 않은 사건(일본영화의 그 기발한 아이디어란! 저렇게 참신한 아이디어가 통통 튀어다니는 한국 영화란 얼마나 드물던가? 소위 컨셉 하나로 영화 하나를 다 떼우는 "집으로", "굳세어라 금순아", "라이터를 켜라"같은 영화를 보고 있으면, 산업적 성장 하나만 가지고 한국을 아시아 영화의 중심이라느니 떠들어대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게 아닐까 싶어진다.)을 통해 성장하고 강해지고 무엇보다 삶을 긍정하게 된다. 한마디로 건강한 영화다. 일본 문화는 잔인,변태이기 때문에 일본문화 개방은 안된다 어쩐다 헛소리를 해던 게 불과 몇년 전인데, 일본문화 수입된 후 한국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은 얼마나 안잔인하고 안변태적인가? 친구, 나쁜남자,...
여튼 이 영화는 엄마없는 하늘아래 살고 있는 어린 두 형제와 배다른 젊은 누나,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찢어지게 가난하고 약간씩 비정상적인 섬마을 사람들의 개그쇼를 보여준다. 하지만 아무리 개그를 해도 옆자리 여자처럼 기어이 훌쩍거리게 되는 감동은 하나씩 낑궈져있고, 역시나 뒤집어지게 웃기는 장면도 등장한다. 정말 일본영화가 짱이다, 옛날영화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