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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zu의 방안의 사계절

Ozu 2013. 7. 22. 11:33

 




[ 지금은 폐간된 영화잡지 kino의 1998년 12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1895-2001 일본영화 진검승부> 꼭지 중 Ozu부분만 발췌했습니다.

폐간된 잡지사이기 때문에 문제삼는 분이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혹시라도 저작권이 문제될 경우 제게 알려주시면 바로 삭제하겠습니다. ]

Ozu의 방안의 사계절 部屋の中の季節

Ozu는 미조구치 겐지와 함께 일본영화의 고전주의를 완성한 두 사람 중의 하나다. 그는 가족극 이야기를 순환하면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였으며, 같은 카메라 구도 안에서 같은 렌즈를 사용하고 같은 방법으로 연출하고 같은 방식으로 편집하였다. 그에게 반복은 차이이며, 차이 안에서 계속 반복하였다. 그는 계절을 가지의 무대로 삼으면서 결코 방 바깥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그는 자기의 영화 전체가 하나의 원이 되기를 원했으며, 그런 의미에서 Ozu는 영화가 삶의 방식에 대한 시적인 우주가 되기를 원한 작가다.

Ozu는 이상한 사람이다. 그는 1903년 12월 12일에 태어나 60년을 살고(동양에서 이야기하는 인생의 하나의 완성된 원) 1963년 12월 12일 자기 생일에 죽었다. 그는 계속해서 가족들의 이야기를 다루었지만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지냈으며,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는 계속해서 같은 배우들에게 같음 배역을 맡겼으며, 48년 이후 단 한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한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Ozu는 살아 생전에 단 한 번도 서방세계로부터 주목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 자신도 별다른 예술적 야심이 없었으며, 그 자신의 작은 공간을 이루는 세트와 평범한 야외에서 사소한 가정극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의 영화들은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비평가들로부터 일정한 거리만큼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70년대 이후 서방세계에서 그의 추종자들이 나타났다. 빔 벤더스는 그 첫 번째 세대이다. 그리고 뒤이어 짐 자무쉬는 미국에서 Ozu는 베끼기 시작했다. Ozu에 대한 관심은 점점 더해졌다. 폴 슈레이더는 Ozu가 칼 드레이어, 로베르 브레송과 함께 영화에서 초월적 스타일을 완성한 작가라고 찬양했다. 노엘 브뤼쉬는 Ozu의 영화가 서구 영화 전체의 재현 시스템 자체의 전제조건 그 모두를 해체시키고 있다고 경이롭게 지켜보았다. 데이빗 보드웰은 Ozu의 영화를 연구하기 위하여 일본어를 배워서 일본 시네마데끄에서 그의 전작을 보고 난 다음 그 전체가 영화에서 하나의 시학을 이루었다고 탄식하였다. Ozu는 점점 더 거장이 되어가고 있다. 일본의 90년대 영화감독들은 그 누구라도 Ozu를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그들 스스로 Ozu를 베끼고 있는 지경으로부터 결코 도망칠 수 없다.

Ozu는 1927년 무성영화에서 시작하였다. 다소 의외이긴 하지만 그의 첫 번째 영화는 시대극 <참회의 칼>이다. 그는 28년에 5편, 그리고 29년에 6편, 30년에 6편을 만들었다. 그가 평생 만든 53편의 영화 중 17편을 3년 사이에 만든 셈이다. 그는 32년까지 23편의 무성영화를 만들었으며, 헐리우드 슬랩스틱 희극과 활극영화에 열렬한 지지를 보내는 작품들을 만들었다. Ozu는 이미 고전적인 편집방법과 희극적 묘사에서 능수능란했으며, 몇편의 연작과 유사한 작품들을 만들었다. 그 중에서 <대학을 나오기는 했다만>(29)과 <낙제를 했다만>(30) 그리고 <태어나기는 했다만>(32)은 서로 껴안고 있으면서 다른 영화이다.

그런데 32년 토키영화 <다시 만날 날까지>부터 변화가 시작되었다. 그는 자기의 이야기를 바꾸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말하는 방식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럼으로써 그에게서 영화의 발화인 텍스트의 구조 자체를 바꾸어 놓기 시작했다. 그는 미조구치처럼 크레인에 의한 롱 테이크나 딥 포커스, 또는 쿠로사와의 멀티 카메라에 의한 동시 연출과 같은 것에는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다. Ozu는 영화에서 편집의 방법을 바꾸어보려고 하였다. 그것은 시선을 바꾸는 것이며, 그것으로 대화하는 체계를 다시 구성하고, 그 안에서 영화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구성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Ozu가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은 형식의 실험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구의 영화 고전문법이 자기의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불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안에서 형식의 자의식이 들어있는 한편 그 자체로 자기가 살아가는 일본의 삶의 재현과 질서에 영화를 맞추어보려는 조화와 중재의 껴안음과 어우러짐이 있다. Ozu에게서 형식은 긴장이 아니라 이완과 다가섬이다.

Ozu 스타일이라고 불리는 방법으로 완성된 첫 번째 영화는 <만춘>(49)일 것이다. Ozu는 여기서 서구적 데꾸빠쥬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서 시선의 상상선과 45편집체계의 나누기를 하지 않았다. 그는 일치하지 않는 상상선으로 편집의 흐름을 중단시킴으로써 영화 이미지의 연속성의 원칙을 부정한 것이며, 더 근본적으로 두 등장인물 사이의 보이지 않는 관객을 디제시스 공간 안에 포함시킨다는 원칙을 (영화이론에서 봉합(suture)이라고 부르는) 버린 것이다. 그러나 Ozu의 이러한 방식은 일본 영화 안에서도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일본 평론가인 사토 다다오조차도 Ozu의 이런 스타일은 인물들이 상대방과 대화하는 것처럼 보이기보다는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Ozu 영화에서는 공간의 어떤 배열도 결국 읽기를 요구하는 텍스트라는 점이며, 단지 있는 그대로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Ozu의 이러한 접근은 3차원에 관한 일본인들의 접근 방식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Ozu는 자신의 영화 중간중간에 삽입 쇼트로 들어가는 정지된 풍경을 반복적으로 집어 넣었다. 그것은 그 자체로 그저 기차이며, 공장의 굴뚝이며, 야구장의 전광판이며, 골목의 술집 네온 사인이지만 그러한 쇼트의 특성은 복합적인 관계를 만들어내며, 다양한 방식으로 디제스틱한 흐름을 지연시킨다. 서구의 비평가들은 이것을 일본 전통문학 와가(和歌)에서의 ‘마구로-고도바(枕詞)’와 맥을 같이하는 필로우-쇼트라고 불렀다. 이 양식이란 일본적인 가족관계에 의지한 인간중심주의로 다시 재배열되었다. Ozu의 카메라는 360도로 고정시킨 채 편집을 통해 원형으로 이동시키면서 프레임 내의 구성과 카메라/디제시스 관계 양자에 모두 적용되는 중심의 법칙에 의해 제시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Ozu의 필로우 쇼트들은 카메라가 잠시(때때로 오래) 자연의 움직이지 않는 쇼트들에 초점이 맞춰질때 비슷한 탈중심화의 효과를 가진다. 대부분 그들의 보이지 않는 순간 대신 그들 옆에 있는 커피 포트, 지붕, 가로등, 빨래줄과 같은 사물이 보여진다. 이 쇼트들은 특정 담론에 끼어들어 각각의 탈중심 효과가 그 자체의 독자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Ozu는 이것을 <초여름>(51>과 <동경 이야기>(53)에서 더 밀고 나아갔다. 그는 이 안에서 항상 50미리 표준렌즈를 버리지 않고 거의 고정된 카메라로 마치 멈추어 선 것처럼 가족들의 이합집산의 내면을 담아냈다. 그것을 담기 위해 Ozu는 가장 좋은 시선의 위치로 이른바 다다미 쇼트라고 불리는 로우 앵글 쇼트를 시종일관 하나의 원칙처럼 사용하였다. Ozu 이외에 다다미 쇼트를 사용한 사람은 나루세 미키오 뿐이다. 그러나 나루세의 영화에서는 자주 로우 앵글 쇼트가 보여지지만 앉아 있는 등장인물의 하이 앵글(미조구치의 영화에서처럼)이 함께 사용됨에 따라 로우 앵글 스타일은 일본영화에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Ozu는 이 쇼트를 단지 가옥 구조 때문에 사용한 것이 아니다. 그는 49년 이후 자가의 카메라를 완전히 멈추어버렸다. 그리고 그의 등장인물들은 이동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멈추어 앉아서 이야기하면서 이야기를 진행시킨ㄷ. 그 안에서 영화는 이야기를 발전시키고, 등장인물이 들어가고 나오며, 사건을 겪으면서 그 안에서 전체가 하나를 이루면 인물 중의 하나가 빠져 나가고 그 공간 만큼 비어있는 여백 안에서 남은 사람은 가족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슬픔에 잠긴다. 그러니까 그의 카메라가 내려 앉은 것은 이미 그 자체로 이미 완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Ozu의 영화는 시작할 때가 가장 완전한 구도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구조는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미조구치처럼 잔혹한 운명이나 쿠로사와처럼 거시적인 폭력이나 나루세처럼 시대의 변화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다. Ozu에게서 그 변화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나이를 먹은 아내는 죽음을 맞이하고, 나이가 찬 딸은 시집을 가야한다. 그러나 아직 살아남은 늙은 남편은 혼자 살아야 하며, 딸을 시집보낸 늙은 아버지는 이제 모든 것을 혼자 해야 한다. 그리고 슬프지만 과부인 어머니는 영원히 그의 달과 함께 살 수는 없는 것이다. Ozu에게서 그저 혼자 남는 것에 대한 슬픔이 남겨질 뿐이다.

Ozu는 58년 <피안화> 이후 단지 여섯 편의 칼라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영화들은 영화사상 가장 침울한 영화들에 속할 것이다. 그 안에는 이미 죽음이 깊이 드리워져 잇다. 등장인물들 중의 그 누군가는 계속 죽어서 실려나가거나 아니면 그들의 대화는 죽은 자에 관한 것이다. Ozu의 마지막 영화 <꽁치의 맛>은 홀아비인 늙은 아버지가 과년한 딸을 시집 보내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그리고 결혼식이 끝난 후 집에 와서 평소처럼 잠에 든다. 하지만 밤은 길고 늙은 아버지는 잠을 자다가 목이 말라서 깨어난다. 그는 불현듯 이제 죽을 때까지 혼자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순간 주전자는 더 없이 슬퍼 보인다. 영화는 거의 죽음과도 같은 침묵에 쌓인 필로우 쇼트들의 연속 속에서 끝난다. Ozu는 그 순간 더할나위 없는 영화의 가장 순수한 형태의 슬픔과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Ozu의 영화는 한편씩 보아서는 아무런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영화다. 그의 영화는 전체를 볼 때 비로소 그 자체가 하나의 우주를 만드는 병풍이다. Ozu는 미조구치가 만든 병풍과는 다른 의미에서 가옥 속에 살아가는 가족들에 관한 일상의 시학을 담아낸 것이다.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