幻の光 환상의 빛 ★★★☆
幻の光 환상의 빛 ★★★☆
감독 : 고레에다 히로카즈
naver imdb
몇 편 보지 않았지만, 올해 본 영화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일본 영화는 역시 <아무도 모른다>였죠.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는 세계적 거장이 고작 4편 밖에 장편영화를 만들지 않았다는 점은 의외랄까요... 하나같이 재밌는 영화였지만, 제 경우 역시 베스트는 <死後 원더풀 라이프>. 음... 그래서 뭐 어쩌라구...
진작부터 봐야지봐야지 하며 2년여를 뻐팅겨온(?) 그의 장편 데뷔작 <幻の光 환상의 빛>을 지난주에야 보았습니다. 갑자기 '봐야겠다' 맘먹게 된 건, 뒤늦게나마 이 영화에 아사노 타다노부씨가 나온다는 걸 알게 되어서죠. 아, 아사나 타다노부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남자 배우에요. 타다노부가 저한테 결혼하자고 하면 결혼할 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_-
내용은 이렇습니다. 가난하지만 금슬좋은 젊은 부부가 있습니다. 3개월된 아들도 있구요. 다른날과 변함없던 어느 평온한 날 오후, 공장에서 일하고 있어야 할 남편은 비가 올 것 같아서 잠깐 들렀다면서 우산을 챙겨가지곤 집을 나섭니다. 배웅하는 아내를 뒤돌아보지도 않고-그렇다고 도망간다,는 느낌이 들지도 않고, 그냥 무심하게-걸어갑니다. 그리곤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죠. 실의에 빠져 몇 개월을 보낸 아내는, 동네 아주머니의 소개로 선을 보고 재혼을 합니다. 어느 시골 어촌마을에서 신혼생활을 하게 된 그녀는 곧 그 곳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다시금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이 영화에서, 감독이 의도적으로 그랬을 거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아사노 타다노부의 얼굴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카메라에 등을 돌리고 있는 장면도 자주 나오구요, 영화 초반에 자살해 버립니다. 실루엣도 희미하고 얼굴도 가물가물하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영화 속에서 그의 존재감은 전혀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젠 완전히 잊고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생각나는 그런 옛사랑 같은 게 있지 않나요? 알고 보니, 난 그/그녀의 기억을 단 한 번도 잊고 살았던 적이 없다는 걸 갑자기 깨닫고, 이 질긴 집착에 섬뜩해지는 느낌... 그렇습니다. 이 영화에서 이유없이 죽은 남편의 기억은 애틋하다기보다 떠나지 않고 항상 주위을 떠도는 망령처럼 섬뜩한 느낌입니다. 쉽게 찾아온 마음의 평화와 육체의 행복-놀랍게도 섹스씬 비슷한 것도 나옵니다. 그 씬에서 아내는 새남편의 육체에 만족해 하고 있구요-의 순간에도, 이 행복이 죽은 남편의 기억 때문에 언제든지 깨어져 버릴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죽음'이 남겨진 자에게 지우는 무게감과 그걸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해야만 하는 남겨진 자의 과제라는 묵직한 주제를, <환상의 빛>은 심심할만큼 평온하고 단순한 이야기에 담아 내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오즈 야스지로의 <도쿄 이야기>가 생각나는군요. 삶의 한 국면으로서의 죽음을 <도쿄 이야기>에서처럼 '달관' 정도로 받아들인다기 보다, 삶에서 맞닥뜨린, 하지만 해결하지 못한 어떤 '신비'나 수수께기처럼 '포기'하고 마는 듯한 인상이긴 하지만요. 감독의 나이도 적고 하니까 그 정도만으로도 납득할만하지 않나요? 뭐랄까, 성장영화같은 느낌도 들고 말이죠.
고정된 카메라나 뜬금없이 삽입되는 자연의 풍광 등이 오즈 야스지로를 연상케 한다면, 롱 테이크은 후 샤오시엔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술적 야망이 큰 영화이고, 동시대의 다른 일본 영화와는 궤를 달리하는 뛰어난 데뷔작이라는 건 알겠지만, 뭐랄까요, 재능있는 모범생의 착실한 답안같다고나 할까요? 재밌는 영화고 명성에 값하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뭔가 데뷔작다운 임팩트가 부족하군요. 전 역시 <사후>나 <아무도 모른다> 쪽이 더 맘에 듭니다.
미국판 DVD 커버아트는 그야말로 기가 막히군요. 이게 도대체 뭐하자는 센스일까요? (2005·10·09 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