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공대신문] うなぎ 우나기 ★★★★
うなぎ 우나기 ★★★★
今村昌平 1996
imdb
[학교신문에 1999년 6월 4일 제141호에 실은 글입니다... ]
이마무라 쇼헤이의 '우나기'는 이전에 개봉된 두 편의 일본영화들에 비해서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하다. 아내를 몹시 사랑하는 난폭한 형사같은 매력적인 캐릭터도 없고 화면을 가득 메우는 사무라이들의 스펙터클도 없다. 이 영화의 로맨스라는 것도 이와이 순지의 영화의 그것과 비교하면 무덤덤하기만 하다. 일본영화이기 때문에 부여되던 심리적인 가산점도 더 이상은 무효한 이때, 관객들의 외면을 받기에 안성맞춤인 영화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정녕 볼 이유가 없는 영화인가?
이마무라 쇼헤이는 6,70년대를 일관적인 전투적 자세로 영화를 찍어온 감독이다. 그는 일본 근대화의 치부와 그 속에 내재된 파시즘, 그리고 일본인의 정체성에 대해 역겨울 정도로 즉물적인 방식으로 접근하고 고발하였다. 그러던 그가 8년만에 다시 찍은 영화가 난데없이 이다지도 따뜻하고 희망적인 영화인 것이다. 역사성이란 것이 전혀 없었던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는 차치하고라도, 2,30대의 청년기에 가장 예리한 진보적 좌파영화작가이자 스타일리스트로 파시즘과 혁명을 말하던 베르톨루치가 40대 이후부터 어떤 영화들을 찍고 있는지 기억해본다면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의 이 돌연한 변화는 변질, 순응, 포기 등의 의혹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녕 그럴까? 이에 대답하기 위해선 이 영화가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이 영화는 아내의 불륜에 분노하여 살인을 저지른 한 남자가 출역후 어떻게 사람들과 어울려살면서 그의 상처를 치유하는가에 관한 영화이다. 다시말하면 치유에 관한 영화이지 속죄에 관한 영화는 아닌 것이다. 중요한 것은 타인과 더불어 앞으로 잘 살아나가는 것이지 그의 현재의 행동방식이 옳은가 틀린가에 대한 소모적인 고민이나 과거의 잘못을 되돌이키기 위한 자기학대가 아니다. 이 낯선 일본 노감독의 평범해보이는 영화에 주목해야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60년대 유럽혁명의 패배에 좌절하고 오리엔트의 엑조티즘에 경도된 베르톨루치의 아름답지만 무의미한 영화와는 달리, 이마무라의 '우나기'는, 새로운 시대에도 변함없이 존재하는 폭력과 착취의 사회구조하에서 한 개인이 자유로움과 삶의 가치를 찾을 수 있는 길은 '타인과의 교감'이라는, 대가다운 연륜에서 나온 교훈을 제시해주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의 영화적 변화를 시대정신의 무뎌짐이나 현실감각의 상실 등으로 폄하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그의 이와같은 변화에서 진정성이 느껴지는 것은 불완전하고 때로 위험하기까지한 인간에 대한 그의 변함없는 관심과 그 시선의 따뜻함 때문일 것이다.
한편 '우나기'는 일견 단순해보이는 갈등과 사건들 속에 다른 대부분의 뛰어난 작품들처럼, 쉽게 해석됨을 허락하지 않는 난해함과 다의성을 갖고 있다. ( 동시에 그것이 전혀 현학적이거나 억지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 즉, 서술상의 의도적인 애매모호함으로 인해, 실제로 등장인물들에게 일어난 일들은 초반부의 내러티브와는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가정도 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어쩌면 아내는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고 임포턴트인 주인공 자신의 강박관념에 의해 우발적으로 살인을 한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때의 뱀장어는 주인공의 자폐성의 상징이 아니라 억눌린 성욕에 대한 은유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고, 이 영 화는 앞서 서술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 또한 이 영화에는 내내 미소짓게 만드는 잔잔한 유머와 야쿠쇼 코우지의 뛰어난 연기가 있어 영화보는 재미를 더해준다.
감각만 있고 사유는 없는, 예컨대 이와이 순지의 영화가 사랑받고 있는 요즘의 경향에서 한걸음 비켜나있는 영화인 탓에 엄청난 흥행은 못했지만, 그런 결과가 다소 유감스러운 영화이다. 뛰어난 상상력과 세련된 이미지로 무장한 재미있는 영화는 언제나 볼 수 있지만, 연륜에서 나온 지혜와 인간에 대한 애정에서 나온 따뜻함이 담겨있는 영화는 자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