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지일보에 실린 '내게 창자를 보여도!'라는 기사
http://www.ddanzi.com/ddanziilbo/movie/see/see_19.asp
에 대한 기사평이 여러개 올라왔습니다. 아래는 그에 대한 답변으로 적은 글입니다.]
위 기사를 쓴 딴지 영진공 우원 꼭도입니다.
우선 기사에 실린 '잔인한 사진'들에 불쾌해지신 분이 계시다면 사과의 말씀 드리겠습니다. 영화가 영화다보니 그런 사진들이 실리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기사평을 써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욕만 들입다 하신 분께도 나름대로 감사드립니다. ^^
기사 분량 제한 상 부득이 포함시키지 못한 얘기들과, 여러분의 기사평에 대한 저의 입장(?)을 몇 자 적어보겠습니다. 이 기사의 오리지널 버전은 http://www.cocteau.pe.kr/movie/mycritic/intestine.htm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내게 창자를 보여달라”고 말했을 뿐이지 “여러분들도 창자를 봐야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여러분 대다수가 갖고 계실, 고어씬에 대한 반감을 ‘호감’으로 바꾸길 강요한 글이 아닙니다. 저의 입장은 마치 이성애자에게 ‘동성애를 지지하라’고 설득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떤 사람이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이 없어져야 한다고 믿는다면, 설득당하는 사람의 성적 취향과 관계없이 그에게 ‘동성애 지지’라는 입장을 종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더러 동성애자가 되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니지요. 고어씬이 싫으십니까? 그렇다면 계속 싫어하세요. 고어씬이 들어가는 영화, 보지도 모세요. 누가 보라고 강요합니까? 대신 고어팬들이 자신의 취향대로 고어영화를 즐기는 것을 방해하거나 비난하거나 비슷한 효과를 내는 조치에 동의하지 말아주세요. 그런 짓은 다수의 힘을 빌어 소수에게 행하는 ‘폭력’입니다.
고어팬들은 세상 모든 영화에 창자가 튀어나오고 골수가 뿜어져 나오는 장면이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고어팬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들을 온전한 상태로 어렵지 않게 입수하여, 자신의 취향에 대한 주위의 편견없이 즐길 수 있길 바랄 따름입니다. 자신들의 취향이 존중받길 원하는 것이지요. 제가 위 기사를 쓴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고어씬에 대한 선호라는 소수의 취향을 허용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부담해야하는 비용이 무척 크다면, 지금처럼 고어장면을 삭제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위 기사에 썼듯이, 그런 취향을 허락하는 데 필요한 비용이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특정 양식의 고어씬에 충분히 단련되어 왔습니다. 또 고어씬보다 더 쇼킹한 비주얼(‘인체의 신비전’)에도 별다른 정신적 데미지의 징후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고어씬도 에로영화처럼 일정 연령 이상에게만 허용되야할 것입니다. 지하철 내 TV처럼 불특정 다수에게 보여주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고어씬을 볼 의향이 있는 성인들에게만 보여지는 고어영화들이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킬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관점의 차이에 따라) <피를 빠는 변태들>이 <타이타닉>보다 ‘어떤 면’에서 덜 잔인할 수도 있다”는 저의 기사에 불쾌해 하십니다. 저는 ‘누가봐도’ <타이타닉>이 <변태들>보다 더 잔인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관점의 차이에 따라 그렇게 볼 수도 있다고 말씀드렸을 따름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과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수용할 수 없는 겁니까? 아니면 저의 관점은 100% 틀리고 여러분들의 영화읽기만이 100% 맞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여러분들은 ‘잔인하다’는 단어를 ‘얼마나 피와 내장이 노출되는가?’라고 정의하시고 계십니다. 그런 정의하에서 <변태들>의 살인은 <타이타닉>의 살인과 비교할 수 없다고 말씀들 하십니다. 하지만 그건 <변태들>같은 영화는 잔인한 영화니까 <변태들>은 잔인하다는 동어반복처럼 들립니다. 반면 저는 ‘잔인하다’를 ‘희생자의 수와 그들의 죽음이 영화속에서 얼마나 도구화되고 있는가?’로 정의합니다. <타이타닉>에는 물론 감동적인 죽음씬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멋있게 죽었느냐와 관계없이 그들은 단지 ‘도구’일 뿐입니다.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는 낭만적 로맨스라는, 지극히 블록버스터스러운 코드를 완성하기 위한 수식어 같은 것입니다. 그런 장면이 삽입되지 않았다면 <타이타닉>은 보다 더 지루한 영화가 되었겠지만, 동시에 그 사람들이 모두 대사 한마디나 클로즈업 한번 없이 죽어갔다 하더라도, <타이타닉>이라는 영화는 만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결국 그 멋진 죽음들은 디카프리오가 죽어가는 장면에서 관객의 감정이입이 최고치에 이르도록 계획된 것입니다. 게다가 <타이타닉>에는 얼굴도 분간이 안가는 수백명의 엑스트라들이, 여객선 침몰의 리얼리티를 극대화하기 위해, 관객이 보기 원하는 스펙터클을 보여주기 위해, 외마디 비명과 함께 익사했습니다. 역사적 재현이라고 그런 장면이 모두 도덕적으로 용서될 수 있을까요? 그럴수 있다면 고어영화의 도살씬들은 탈역사의 관점에서 구제받을 수 있습니다. 좀비와 유령, 혹은 법적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정신병자들의 있지도 않았던 연쇄살인에 무슨 도덕적 평가를 하시겠다는 겁니까? 제가 보기엔 <타이타닉>의 수백명의 죽음이 <변태들>의 11명의 죽음보다 덜 잔인할 이유가 별로 없어보입니다. 여러분들이 고어영화를 비난하시는 근거인 ‘잔인성’은 사람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일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달리 생각하면 여러분이 잔인의 극치로 생각하는 고어씬이 고어팬에겐 그저 재밌는 장면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왜 그런 장면이 재밌으면 안됩니까? 저로선 콧방귀만 나올뿐인 디카프리오의 죽음에 극장 안 여자관객들은 질질 짜더라는 상황에 직면하여, 저는 ‘사람에 따라서는 저런 신파가 슬프기도 한가보다’고 생각했습니다. 디카프리오의 죽음을 해석하는 다른 방식이 있을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였던 거지요. 그게 합리적이고 건강한 판단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정말 <타이타닉>이 <변태들>보다 잔인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되나요? 뭐 못마땅하시다면 게슈타포에게 고자질이라도 하시든가.
여전히 스너프와 고어영화를 동일하다고 생각하시며 고어영화에 대해 성토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고어영화가 “인간에 대한 경외심을 저버리게 만드는 파행적인 욕구”의 발로라는 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고어와 스너프는 전혀 다릅니다. 고어와 스너프를 혼동하는 것은 결국 고어영화를 애시당초 본 적도 없거나 <기니아피그>시리즈의 <혈육의 꽃>처럼, 아주 예외적인 고어영화만을 보셨다는 증거입니다. 스너프의 핵심은 그것이 진짜라는 점입니다.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이 뽀록나면 더 이상 스너프가 아닙니다. 하지만 고어팬들이 즐기는 고어영화 중에는 자신이 스너프라고 구라치는 영화가 거의 없습니다. 고어영화사상 가장 많은 피를 뿌렸던 피터 잭슨의 <데드 얼라이브>를 보고 어느 정신나간 사람이 그걸 진짜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잔인하기로 소문난 루치오 풀치의 영화조차 그 조악한 특수효과로 인해 거의 리얼리티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어떤 고어 팬은 ‘비웃는 재미’에 고어씬을 본다”는 저의 기사에 의혹을 제기하셨던 분께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의 영화중에 “좀비2”라는 영화가 국내에 기적적으로 무삭제판으로 출시되었습니다. 한번 구해다 보세요. 좀비가 상어와 몸싸움을 하는 이 영화의 어느 부분이 스너프 같습니까? 설혹 <혈육의 꽃>처럼 진지하게 스너프인척 하는 극소수의 영화를 즐기는 고어팬이 있다고 칩시다. 여러분은 그 고어팬이 영화속 여자의 죽음을 실제라고 자기암시하며 범죄적 쾌감에 빠진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은 무슨 액션영화에서 수도없이 죽어나가는 엑스트라의 죽음에 순간순간 리얼리티를 부여해가며 감상하십니까? 여러분에게 가능한 사리분별이 고어팬에겐 불가능할거라고 생각하시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고어팬은 정신병자란 말입니까?
고어가 “인간에 대한 경외심을 저버리게 만드는 파행적인 욕구”로 비춰질 소지는 충분합니다. 하지만 영화속 상황으로 내장적출을 즐기는 것과 현실세계의 인간에 대한 경외는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고어팬은 그것이 단지 영화 속 상황일 뿐이라는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영환지 현실인지 헷갈리는 건 오히려 고어를 싫어하시는 분들입니다. 실제 70년대 이탈리아에선 실제 시체들을 등장시킨 고어영화가 있었지만 고어팬들의 무관심속에 망해버렸습니다. 저 자신만 해도 죠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낮>은 킬킬대고 보지만 <인체의 신비전> 비디오는 다 볼 수 없었습니다. 비위좋으신 일반시민 여러분들과 달리 고어팬인 전 그 진짜 시체들을 끝까지 볼 수 없었습니다. 너무 잔인해서.
마지막으로 어느 고어감독의 말을 인용하며 “고어 영화의 특성이 결국 말초신경자극적이며 배설적”라고 말씀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어떤 고어영화들은 정말 ‘결국 말초신경자극적’이라 부를만 합니다. 하지만 다른 장르들의 영화들도 대부분 ‘결국 말초신경자극적’일 뿐이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트리플 X>가 단지 말초신경자극적이라고 액션영화 보지도 말라고 하면 그게 말이 됩니까? 게다가 고어영화는 ‘결국 말초신경자극적일 뿐’이라고 말씀하시는 건, 고어영화에 대한 님의 이해가 얼마나 피상적인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아래 글은 원래 기사에 실려있다가 기사분량상 부득이 삭제했던 부분입니다.
“고어에 대한 또 다른 편견은 고어씬 자체의 존재가치를 부정한다. 이런 편견은 키에슬롭스키의 <색깔 3부작>이 샘 레이미의 <이블데드 3부작>보다 예술적으로 더욱 가치있다고 말하는 것이 영화광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는 일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발견된다. 또한 교육을 위해 진짜 시체를 전시하는 것은 허용해도 단지 재미를 위해 영화에서 마네킹과 동물의 내장을 사용하는 것은 금지해야 한다는 희한한 논리의 근거이기도 하다.
고어라는 영화적 장치의 미학적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자신의 일천한 영화적 지식을 드러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고어씬은 창조성없는 이류 감독들의 선정주의의 볼모가 아니다. 1963년 허셀 고든 루이스의 <피의 향연>으로 시작된 고어영화의 역사는 피와 내장을 무기로 영화가 표현할 수 있는 방식과 주제의 외연을 확대해 왔으며, 고어씬이 갖는 전복적 잠재력에 주목한 작가들-고다르, 빠졸리니, 브뉘엘, 그린어웨이, 올리베이라, 크로넨버그, 로메로 등은 때문에 자신의 영화에 고어씬을 넣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한편 영화 속 고어씬이 뜨거운 예술혼을 구현하거나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교육적 효과를 주려는 대신, 단지 관객들을 ꡐ재미ꡑ있게 하려고 삽입된 경우라 하더라도 그 가치를 부정할 수는 없다. 피터 잭슨이나 샘 레이미의 초기작들은 분명 <반지의 제왕>이나 <스파이더 맨>과는 다른 방식으로 다른 차원의 재미를 주는 영화들이고, 어떤 관객은 오히려 전자들이 더 재밌을 수도 있다.“
http://www.ddanzi.com/ddanziilbo/movie/see/see_19.asp
에 대한 기사평이 여러개 올라왔습니다. 아래는 그에 대한 답변으로 적은 글입니다.]
위 기사를 쓴 딴지 영진공 우원 꼭도입니다.
우선 기사에 실린 '잔인한 사진'들에 불쾌해지신 분이 계시다면 사과의 말씀 드리겠습니다. 영화가 영화다보니 그런 사진들이 실리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기사평을 써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욕만 들입다 하신 분께도 나름대로 감사드립니다. ^^
기사 분량 제한 상 부득이 포함시키지 못한 얘기들과, 여러분의 기사평에 대한 저의 입장(?)을 몇 자 적어보겠습니다. 이 기사의 오리지널 버전은 http://www.cocteau.pe.kr/movie/mycritic/intestine.htm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내게 창자를 보여달라”고 말했을 뿐이지 “여러분들도 창자를 봐야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여러분 대다수가 갖고 계실, 고어씬에 대한 반감을 ‘호감’으로 바꾸길 강요한 글이 아닙니다. 저의 입장은 마치 이성애자에게 ‘동성애를 지지하라’고 설득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떤 사람이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이 없어져야 한다고 믿는다면, 설득당하는 사람의 성적 취향과 관계없이 그에게 ‘동성애 지지’라는 입장을 종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더러 동성애자가 되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니지요. 고어씬이 싫으십니까? 그렇다면 계속 싫어하세요. 고어씬이 들어가는 영화, 보지도 모세요. 누가 보라고 강요합니까? 대신 고어팬들이 자신의 취향대로 고어영화를 즐기는 것을 방해하거나 비난하거나 비슷한 효과를 내는 조치에 동의하지 말아주세요. 그런 짓은 다수의 힘을 빌어 소수에게 행하는 ‘폭력’입니다.
고어팬들은 세상 모든 영화에 창자가 튀어나오고 골수가 뿜어져 나오는 장면이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고어팬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들을 온전한 상태로 어렵지 않게 입수하여, 자신의 취향에 대한 주위의 편견없이 즐길 수 있길 바랄 따름입니다. 자신들의 취향이 존중받길 원하는 것이지요. 제가 위 기사를 쓴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고어씬에 대한 선호라는 소수의 취향을 허용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부담해야하는 비용이 무척 크다면, 지금처럼 고어장면을 삭제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위 기사에 썼듯이, 그런 취향을 허락하는 데 필요한 비용이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특정 양식의 고어씬에 충분히 단련되어 왔습니다. 또 고어씬보다 더 쇼킹한 비주얼(‘인체의 신비전’)에도 별다른 정신적 데미지의 징후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고어씬도 에로영화처럼 일정 연령 이상에게만 허용되야할 것입니다. 지하철 내 TV처럼 불특정 다수에게 보여주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고어씬을 볼 의향이 있는 성인들에게만 보여지는 고어영화들이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킬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관점의 차이에 따라) <피를 빠는 변태들>이 <타이타닉>보다 ‘어떤 면’에서 덜 잔인할 수도 있다”는 저의 기사에 불쾌해 하십니다. 저는 ‘누가봐도’ <타이타닉>이 <변태들>보다 더 잔인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관점의 차이에 따라 그렇게 볼 수도 있다고 말씀드렸을 따름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과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수용할 수 없는 겁니까? 아니면 저의 관점은 100% 틀리고 여러분들의 영화읽기만이 100% 맞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여러분들은 ‘잔인하다’는 단어를 ‘얼마나 피와 내장이 노출되는가?’라고 정의하시고 계십니다. 그런 정의하에서 <변태들>의 살인은 <타이타닉>의 살인과 비교할 수 없다고 말씀들 하십니다. 하지만 그건 <변태들>같은 영화는 잔인한 영화니까 <변태들>은 잔인하다는 동어반복처럼 들립니다. 반면 저는 ‘잔인하다’를 ‘희생자의 수와 그들의 죽음이 영화속에서 얼마나 도구화되고 있는가?’로 정의합니다. <타이타닉>에는 물론 감동적인 죽음씬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멋있게 죽었느냐와 관계없이 그들은 단지 ‘도구’일 뿐입니다.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는 낭만적 로맨스라는, 지극히 블록버스터스러운 코드를 완성하기 위한 수식어 같은 것입니다. 그런 장면이 삽입되지 않았다면 <타이타닉>은 보다 더 지루한 영화가 되었겠지만, 동시에 그 사람들이 모두 대사 한마디나 클로즈업 한번 없이 죽어갔다 하더라도, <타이타닉>이라는 영화는 만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결국 그 멋진 죽음들은 디카프리오가 죽어가는 장면에서 관객의 감정이입이 최고치에 이르도록 계획된 것입니다. 게다가 <타이타닉>에는 얼굴도 분간이 안가는 수백명의 엑스트라들이, 여객선 침몰의 리얼리티를 극대화하기 위해, 관객이 보기 원하는 스펙터클을 보여주기 위해, 외마디 비명과 함께 익사했습니다. 역사적 재현이라고 그런 장면이 모두 도덕적으로 용서될 수 있을까요? 그럴수 있다면 고어영화의 도살씬들은 탈역사의 관점에서 구제받을 수 있습니다. 좀비와 유령, 혹은 법적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정신병자들의 있지도 않았던 연쇄살인에 무슨 도덕적 평가를 하시겠다는 겁니까? 제가 보기엔 <타이타닉>의 수백명의 죽음이 <변태들>의 11명의 죽음보다 덜 잔인할 이유가 별로 없어보입니다. 여러분들이 고어영화를 비난하시는 근거인 ‘잔인성’은 사람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일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달리 생각하면 여러분이 잔인의 극치로 생각하는 고어씬이 고어팬에겐 그저 재밌는 장면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왜 그런 장면이 재밌으면 안됩니까? 저로선 콧방귀만 나올뿐인 디카프리오의 죽음에 극장 안 여자관객들은 질질 짜더라는 상황에 직면하여, 저는 ‘사람에 따라서는 저런 신파가 슬프기도 한가보다’고 생각했습니다. 디카프리오의 죽음을 해석하는 다른 방식이 있을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였던 거지요. 그게 합리적이고 건강한 판단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정말 <타이타닉>이 <변태들>보다 잔인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되나요? 뭐 못마땅하시다면 게슈타포에게 고자질이라도 하시든가.
여전히 스너프와 고어영화를 동일하다고 생각하시며 고어영화에 대해 성토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고어영화가 “인간에 대한 경외심을 저버리게 만드는 파행적인 욕구”의 발로라는 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고어와 스너프는 전혀 다릅니다. 고어와 스너프를 혼동하는 것은 결국 고어영화를 애시당초 본 적도 없거나 <기니아피그>시리즈의 <혈육의 꽃>처럼, 아주 예외적인 고어영화만을 보셨다는 증거입니다. 스너프의 핵심은 그것이 진짜라는 점입니다.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이 뽀록나면 더 이상 스너프가 아닙니다. 하지만 고어팬들이 즐기는 고어영화 중에는 자신이 스너프라고 구라치는 영화가 거의 없습니다. 고어영화사상 가장 많은 피를 뿌렸던 피터 잭슨의 <데드 얼라이브>를 보고 어느 정신나간 사람이 그걸 진짜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잔인하기로 소문난 루치오 풀치의 영화조차 그 조악한 특수효과로 인해 거의 리얼리티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어떤 고어 팬은 ‘비웃는 재미’에 고어씬을 본다”는 저의 기사에 의혹을 제기하셨던 분께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의 영화중에 “좀비2”라는 영화가 국내에 기적적으로 무삭제판으로 출시되었습니다. 한번 구해다 보세요. 좀비가 상어와 몸싸움을 하는 이 영화의 어느 부분이 스너프 같습니까? 설혹 <혈육의 꽃>처럼 진지하게 스너프인척 하는 극소수의 영화를 즐기는 고어팬이 있다고 칩시다. 여러분은 그 고어팬이 영화속 여자의 죽음을 실제라고 자기암시하며 범죄적 쾌감에 빠진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은 무슨 액션영화에서 수도없이 죽어나가는 엑스트라의 죽음에 순간순간 리얼리티를 부여해가며 감상하십니까? 여러분에게 가능한 사리분별이 고어팬에겐 불가능할거라고 생각하시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고어팬은 정신병자란 말입니까?
고어가 “인간에 대한 경외심을 저버리게 만드는 파행적인 욕구”로 비춰질 소지는 충분합니다. 하지만 영화속 상황으로 내장적출을 즐기는 것과 현실세계의 인간에 대한 경외는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고어팬은 그것이 단지 영화 속 상황일 뿐이라는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영환지 현실인지 헷갈리는 건 오히려 고어를 싫어하시는 분들입니다. 실제 70년대 이탈리아에선 실제 시체들을 등장시킨 고어영화가 있었지만 고어팬들의 무관심속에 망해버렸습니다. 저 자신만 해도 죠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낮>은 킬킬대고 보지만 <인체의 신비전> 비디오는 다 볼 수 없었습니다. 비위좋으신 일반시민 여러분들과 달리 고어팬인 전 그 진짜 시체들을 끝까지 볼 수 없었습니다. 너무 잔인해서.
마지막으로 어느 고어감독의 말을 인용하며 “고어 영화의 특성이 결국 말초신경자극적이며 배설적”라고 말씀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어떤 고어영화들은 정말 ‘결국 말초신경자극적’이라 부를만 합니다. 하지만 다른 장르들의 영화들도 대부분 ‘결국 말초신경자극적’일 뿐이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트리플 X>가 단지 말초신경자극적이라고 액션영화 보지도 말라고 하면 그게 말이 됩니까? 게다가 고어영화는 ‘결국 말초신경자극적일 뿐’이라고 말씀하시는 건, 고어영화에 대한 님의 이해가 얼마나 피상적인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아래 글은 원래 기사에 실려있다가 기사분량상 부득이 삭제했던 부분입니다.
“고어에 대한 또 다른 편견은 고어씬 자체의 존재가치를 부정한다. 이런 편견은 키에슬롭스키의 <색깔 3부작>이 샘 레이미의 <이블데드 3부작>보다 예술적으로 더욱 가치있다고 말하는 것이 영화광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는 일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발견된다. 또한 교육을 위해 진짜 시체를 전시하는 것은 허용해도 단지 재미를 위해 영화에서 마네킹과 동물의 내장을 사용하는 것은 금지해야 한다는 희한한 논리의 근거이기도 하다.
고어라는 영화적 장치의 미학적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자신의 일천한 영화적 지식을 드러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고어씬은 창조성없는 이류 감독들의 선정주의의 볼모가 아니다. 1963년 허셀 고든 루이스의 <피의 향연>으로 시작된 고어영화의 역사는 피와 내장을 무기로 영화가 표현할 수 있는 방식과 주제의 외연을 확대해 왔으며, 고어씬이 갖는 전복적 잠재력에 주목한 작가들-고다르, 빠졸리니, 브뉘엘, 그린어웨이, 올리베이라, 크로넨버그, 로메로 등은 때문에 자신의 영화에 고어씬을 넣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한편 영화 속 고어씬이 뜨거운 예술혼을 구현하거나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교육적 효과를 주려는 대신, 단지 관객들을 ꡐ재미ꡑ있게 하려고 삽입된 경우라 하더라도 그 가치를 부정할 수는 없다. 피터 잭슨이나 샘 레이미의 초기작들은 분명 <반지의 제왕>이나 <스파이더 맨>과는 다른 방식으로 다른 차원의 재미를 주는 영화들이고, 어떤 관객은 오히려 전자들이 더 재밌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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